본문 바로가기
객관의 의무

기능이 너무 많아서 AI가 못 읽는다?

얼마 전 행정안전부 산하기관 업무보고 영상을 보게 되었다. 디지털 안전에 관한 회의였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한 참석자가 장관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왜 AI는 아래아한글을 잘 읽지 못하나? 외국 AI라서 그런 건가? 한글 프로그램 자체의 문제인가, 아니면 AI 기술의 문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요지는 이렇다. “아래아한글은 너무 다양하고 전문적인 기능이 많아서 AI가 이해하기 어렵다.”

납득하기 어려운 답변이다. 마치 정부가 한컴을 대신 변호해 주는 것처럼 들렸다. 이 설명은 정부 내부에서 기술적으로 분석한 결과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까. 적어도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문서 프로그램의 기능 수준과 AI의 문서 처리 성능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AI는 문서 프로그램의 기능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으로 만들어진 문서를 처리한다. 제목은 제목이고, 본문은 본문이며, 표는 표다. 사용자가 어떤 메뉴를 눌러 문서를 만들었는지는 AI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AI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문서 안에 담긴 구조와 의미다.

관건은 기능이 아니라 파일 포맷이다. 컴퓨터는 사람처럼 화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저장된 데이터를 읽는다. 바이너리 포맷은 프로그램이 사용하는 내부 데이터를 그대로 저장한다.

0x13
0x42
0xA9
...

반면 XML은 문서의 구조와 의미를 저장한다.

<heading>문서 기술의 진화</heading>

<paragraph>
    안녕하세요.
</paragraph>

사람이 보기에는 두 문서가 똑같다. 하지만 컴퓨터에게는 전혀 다른 문서다. 바이너리는 해당 프로그램이 해석해야 비로소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런데 XML은 프로그램이 달라도 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AI가 문서를 분석하기 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XML이라서 AI가 자동으로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문서의 의미 구조를 표현하기 쉽기 때문이다.

문서 프로그램 초장기였던 1990년대는 메모리는 적었고 저장장치는 비쌌으며 프로세서는 느렸다. 그래서 저장 효율과 처리 속도가 경쟁력이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문서 프로그램은 바이너리 포맷을 선택했다. 아래아한글뿐만 아니라 초기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도 DOC라는 바이너리 포맷을 사용했다.

그런데 인터넷이 보급되고 전자문서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문서는 특정 프로그램 안에만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읽혀야 했고, 콘텐츠 관리 시스템(CMS)과도 연결되어야 했으며, 검색도 가능해야 했다.

이때부터 문서를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지보다 콘텐츠를 어떻게 저장하고 활용할 것인지가 중요해졌다. 문서를 작성한 프로그램이 사라져도 콘텐츠는 남아 있어야 하고,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읽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2000년대 초부터 문서 기술은 바이너리에서 XML 기반으로 전환되었다.

오픈오피스(OpenOffice)가 개방형 문서표준인 ODF(OpenDocument Format)를 만들었고, 2005년 ISO 국제표준으로 채택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DOC 대신 DOCX를 도입하며 XML 기반으로 전환했다. 아래아한글도 HWPML, 이후 HWPX를 도입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본 저장 형식은 HWP였다.

문서 포맷의 문제는 AI 때문에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검색엔진, 그룹웨어, 전자결재, CMS, 기록관리 시스템에서는 문서를 외부에서 처리해야 하는 요구가 있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문서를 해석하는 파서(Parser)다. 파서는 문서 파일을 읽어 텍스트와 문단, 표, 이미지 같은 문서 객체를 다른 프로그램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해 주는 소프트웨어다. 검색엔진, 문서 미리보기도 대부분 이런 기술을 활용하여 구현한는 것이다.

한컴은 폐쇄적인 정책을 선택했다. 기업은 무료 뷰어조차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고, 외부 시스템에서 HWP를 처리하기 위한 개발 도구에도 높은 비용을 요구했다. 한때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래아한글을 인수하려 했다는 사실과 세계 유일의 국산 문서 프로그램이라는 점을 앞세워 애국 마케팅을 펼치던 시절도 있었다. 공공에서 아래아한글 사용이 사실상 강제되더라도 사회적 저항이 크지 않았던 배경이다.

이런 선택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정부와 공공시장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생산되는 문서 대부분이 아래아한글로 작성되면서, 아래아한글은 경쟁으로 선택된 표준이라기보다 행정에서 사실상의 표준이 되었다. 정부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과 사용자들은 불편과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아래아한글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공공시장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믿고 안주한 것이다.

정부에서 생산되는 문서 대부분은 HWP 포맷으로 작성된다. 이 포맷은 아래아한글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문서의 의미 구조를 충분히 해석하기 어렵다. 그 결과 정부의 정보는 의미 기반으로 저장·유통·활용되기보다 화면에 보이는 형태로 관리되어 왔다. 수십 년 동안 정부는 문서를 디지털 자산으로 관리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 타자기로 작성해 온 셈이다. 정부는 이 점을 뼈아프게 느껴야 하는 것이다.